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1572년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루블린 조약|통합]]한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사망한 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은 귀족들의 자유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1697년 합스부르크 제국과 [[루스 차르국]]의 후원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에 선출되었다. 그러다가 [[대북방전쟁]]이 발발했을 때 루스 차르국, 덴마크와 연합하여 [[발트해]]의 패자 [[스웨덴 제국|스웨덴]]에게 전쟁을 선포했으나, [[스웨덴 국왕]] [[칼 12세]]가 탁월한 전투력과 전략전술을 발휘해 연방군을 여러차례 격파하고 [[바르샤바]]까지 공략하자 본토인 [[작센 선제후국]]으로 도피했다. 칼 12세는 아우구스트 2세를 폴란드에서 몰아낸뒤 친 스웨덴 성향의 폴란드 귀족이었던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폴란드 국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1709년 칼 12세가 [[폴타바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대제]]에게 패한 후 스웨덴이 수세에 몰리자, 아우구스트 2세는 도로 폴란드로 쳐들어와 스타니스와프 1세를 몰아내고 왕위를 되찾았고, 스타니스와프 1세는 프랑스로 도망쳤다. 스타니스와프 1세는 프랑스로 달아난 뒤 1725년 둘째 딸 마리아 레슈친스키를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와 결혼시키고 프랑스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폴란드 왕위를 노렸다. 당시 아우구스트 2세는 [[베틴 가문|자신의 가문]]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세습하기를 원했지만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유력 귀족들이 [[폴란드인]]이나 [[리투아니아인]]도 아닌 [[독일인]] 작센 선제후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세습하려 드는 걸 받아들일 리 만무한 데다, 아우구스트 2세 본인도 대북방전쟁 당시 세임(sejm: 폴란드의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웨덴에게 전쟁을 선포했다가 깨끗하게 털려버리고 작센으로 도망친 과거가 있었으니 자신의 뜻을 강하게 밀어붙일 명분도, 힘도 없었다. 결국 세습 제도를 도입하는 데 실패한 아우구스트 2세는 1733년 2월에 사망했다. 이에 스타니스와프 1세는 루이 15세에게 지원을 약속받은 후 변장을 한채 [[바르샤바]]로 잠입한 뒤 유력 귀족들을 설득했고, 귀족들은 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그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스타니스와프 1세는 왕위에서 밀려난 지 14년 만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주변 국가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러시아 제국]]은 친 스웨덴 성향인 스타니스와프 1세가 폴란드 국왕이 된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 역시 루이 15세에게 자기 딸을 바치는 등 명백한 친 프랑스 인사인 그가 폴란드 국왕이 된다면 프랑스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 이에 아버지 사망 후 작센 선제후가 된 [[아우구스트 3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는 [[발트해]] 연안의 영토인 [[리보니아]]를 완전히 장악하길 희망하는 러시아의 [[안나 이바노브나]]에게 리보니아의 [[쿠를란트 공국]]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했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에겐 당시 그가 각국에게 승인을 요청하던 '[[1713년 국사조칙|국사조칙]]'이 승인되는 것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러시아와 합스부르크 제국은 아우구스트 3세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러시아군의 호위를 받은 아우구스트 3세는 [[1733년]] 10월 5일에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입성했다. 그러자 스타니스와프 1세는 그단스크로(당시에는 폴란드 영토였으므로 단치히가 아니라 그단스크이다) 피한 뒤 루이 15세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루이 15세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고, 왕비 마리아 레슈친스카, 즉 스타니스와프 1세의 딸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결혼 당시에는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마리아 레슈친스카는 루이 15세보다 7세나 연상이었고 1733년에는 이미 30대에 접어들었다. 젊은 여성이 취향이었던 루이 15세는 이때 즈음에는 이미 불륜을 저지르는 중이었다.] 사실 루이 15세가 마리아 레슈친스카와 결혼한 배경은 당시 어린 루이 15세의 후견자들이 그녀의 아버지는 땅도 없는 망명자라 다루기 쉬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루이 15세가 성장하자, 그는 자신의 처가가 왕국도 없다는 사실에 불만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 전쟁에 찬동했다. 한편 당시 재상으로서 프랑스의 국정을 도맡고 있던 앙드레 에르퀼 드 플뢰리(André Hercule de Fleury, 1653 ~ 1743) [[추기경]]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누가 되는 것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합스부르크 제국을 공격할 명분으로 딱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큰 성과를 거둬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발칸 반도]]에서 광활한 영토를 확보했고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나폴리 왕국|나폴리]]-[[시칠리아 왕국]]과 [[밀라노 공국]]을 확보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누렸으며, [[라인강]] 일대의 [[로렌 공국]]도 [[합스부르크 가문]] 영향력 하에 두었다. 플뢰리 추기경은 이번 기회에 로렌 공국을 빼앗고자 했고, 나폴리를 되찾고 싶었던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 [[밀라노 공국]]과 [[만토바 공국]]을 공략하고 싶어하던 [[사르데냐 왕국]]의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를 끌여들었다. 반면 합스부르크 제국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때처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가 도와주길 희망했지만, 두 국가 모두 프랑스가 자신들을 굳이 건드리지 않는데 쓸데없이 인력과 자원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중립을 선포했다. 또한 러시아는 폴란드 왕위에 아우구스트 3세를 앉히는 것에 깊게 개입했지만, 군대를 자국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라인강이나 이탈리아 전선으로 파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1733년]] 10월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받고 사실상 홀로 프랑스, 스페인, 사르데냐 왕국의 협공에 직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